디자인: 윤현학
오프닝 Off-ning

이미 주어진
   제도의 가장 내부이면서도 가장 먼 외부를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소위 전위라는 이름 아래 테두리 바깥을 향해 내지름으로써 제도의 가장 깊은 곳으로 포섭되려 하거나, 인접한 것들을 끝끝내 함입시켜 그 외연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시각 예술의 동시대적 경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규약과 관습을 지탱하는 가장 아래의 지반이면서, 동시에 제도가 품는 일반적 형식과 내용에서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것을 상상해 보라. 멀리 갈 필요는 없다. 가장 일상적인 것들을, 그리하여 예술이라 말하는 것의 일상과 또 그것을 이루는 일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삶의 항상적 상태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지난한 일들, 또 제도의 원점과 그로부터 출발하기 위해 언제나 다시 요청되는 세세한 행위들까지 말이다. 물론 약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미술의 공인된 역사는 언제나 그 제도가 작동하는 ‘정상적’ 시공간과 그 토대를 규정하는 규칙, 규범을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벌써 반세기도 전에, 쓸고 닦는 삶의 가장 비근한 노동들조차 예술과 그 제도를 유지, 보수하고 관리하는 일마저 가장 예술적인 일로 선언된 바 있다. 또 삶을 강력한 자의적 규칙들로 제약해 고난에 가까운 일상을 삶으로써, 혹은 심지어 가시화하지 않을지라도 삶의 궤적 안에서 예술을 행하고(‘살아가고’) 있음을 표명함으로써 일상 자체를 예술로 치환한 이조차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제도가 자신의 심연으로 흡수한 선례들은 여전히 삶 아니면 예술, 안 또는 바깥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를 갱신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동시대적 미술의 숙명 위에서, 완전한 탈주 또는 정주 외에 다른 상태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찌하기도 전에 우리 앞에 놓인 바탕이다. 제도를 딛지 않고는 제도 밖을 말할 수 없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그저 일상의 모든 것과 동일해지는, 즉 영원한 바깥에 머물 뿐이라는 ‘사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쪽이면서 동시에 저쪽인 중간 지대란 없으리란(없어야 하리란) 예감. 물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그러하도록, 이미 주어진 것이므로.

일시적으로 점유된
   조수민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특정한 조건에 반응해 자신만의 규칙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질문해 왔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함께, 귀국 이후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 경험은 이후 이어질 그의 본격적 ‘작업’의 전환점이 되었다. 개인적 상황과 더불어, 특히 당시 팬데믹이란 특수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작가는 가장 내밀한 장소라는 집마저 고정된 사적 영역이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점유된 공간임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에게 개인의 영역이란, 그것이 개념적 위상이든 물리적 장소이든 간에 일정한 조건에 의해 잠정적으로 허락된 경계다. 이로부터 그는 학교 작업실처럼 공적이면서도 제한적으로 사적인 공간들에서 최소한의 제 자리를 형성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다만 그의 점유는 영토를 공고히 하는 팽창적 제스처가 아닌 청소와 같은 기초적 노동, 일상적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이는 공적 공간에 남겨진 무수한 흔적을 지움으로써 공백을 남기는 음성적(negative) 방식이다. 이러한 흔적, 또는 그의 ‘작업/작품’은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에서 곧 소멸하고 만다. 따라서 그는 점유를 지속하기 위해 공동체의 규율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그 틈새를 활용할 수 있는 독자적 지침을 마련한다. 이는 노동의 빈도, 지속시간, 순서 등을 명시하는 반복 가능한 절차로 체계화되며, 보다 성문화된 규약들에 대응해서는 문서화되고 엄격하게 준수된다. 다만 작가의 점유의 실천은 언제나 가장 일상적 노동-행위에 국한되며, “흔적을 남기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강령을 고수한다.
2022년 초, 서울 을지로의 한 예술공간(중간지점, 서울)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는 그의 수행이 미술 제도적 시공간과 직접적으로 교차하게 되는 일종의 확장점으로 기능한다. 약 1년간 그에게는 해당 공간의 전시와 전시 사이 간극을 점유하면서, 다음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전시장을 ‘무결한 화이트큐브’ 상태로 환원해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졌다. 이에 반응해 작가는 복구 과정의 절차 등을 매뉴얼화 하고, 이에 따른 유지⸱보수 노동을 반복하는 것을 자신의 ‘작업’으로 삼았다. 다만 이때 그의 ‘창작’ 행위는 일반적으로 운영진에 의해 수행되는 전시장 유지 일과 행위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노동이다. 따라서 그의 반복된 창작은 결국 스스로의 일상적 노동으로 수렴하게 되며, 전시장 운영의 일상이 그의 일상이 된다. 결국 그의 ‘창작-작업-작품’이 그러한 것으로서 ‘성립’되는 것은 스스로 수립한 규칙과 더불어, 이미 기능하고 있는 미술 제도(적 공간)와 그 시공간적 맥락에 달려 있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마침내 규정지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어찌 할 수 없게 놓인 조건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기반하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스스로가 통제 가능한 규칙과 행위를 조건에 따라 반복 조정하고 수행할 따름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상적 노동을 예술적 실천으로 치환해 일상으로부터 분리하고, 동시에 제도적 맥락에 대한 반응적 개입으로서 그의 작업을 임시적으로 규정, 작동시킨다. 그러나 반복된 수행은 소위 ‘예술적 행위’를 다시 일상으로 수렴시키며, 작가의 자의적 구분 역시나 제도적 맥락 아래 포섭되어 끝내 무화-가치화되리란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 다만 작가는 변화되어 다시 주어진 조건과 그 일상을 거듭해 일시적으로 점유할 뿐이다.

닫으며 여는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2023년 중순, 아마도예술공간이 그가 반응할 조건으로서 주어졌다. 그 조건이란 다시 말해, 아마도예술공간으로 지칭되는 물리적 장소와 그곳에 뿌리내려 약 10년간 형성되어온 이 기관의 개념적 틀을 총칭한다. 우선 작가가 그에게 허락된 경계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운영진으로부터 성문화된 공간 사용 규칙이 전달되었다. 문을 개폐하는 방법, 어디엔 못을 박을 수 없다 따위의 시시콜콜한 허용과 금지의 가이드라인을 마주하며, 작가는 일종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움을 촉발⸱수용하려는 동시에, 쌓아올려진 것들을 보존⸱유지하려는 양가적 의지와 상태다. 작가가 포착한 이 이중성은 단적으로는 공간의 기묘한 물리적 상태에서 가장 쉽게 드러난다. 아마도예술공간의 대안적 정체성에 말미암아 특수한 주택 구조와 실험의 잔재들이 계속 보존되면서도, 보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수용할 수 있는 미술 기관으로 기능하기 위해 공간의 일부는 중립적 화이트큐브 상태로 개선-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위상 역시 대안공간과 공공화된 기관 사이 어디쯤 위치하면서, 그 운영 구조는 비공개로 유동적이나 실질적 운용은 지속적으로 체계화된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결국 작가는 아마도예술공간을 “‘보존과 개선’, ‘유지와 변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간 지대”로 해석하고 이러한 양태를 구축해 온 그간의 흔적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개입은 지금까지 지속해 온 ‘일시적 점유’로서의 작업 방법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운영진이 제시한 매뉴얼에 대응해 스스로의 점유 규칙을 세운다. 이로써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는 동시에 놓인 조건을 파고들 여백을 마련한다. 작가가 먼저 침투하는 틈새는 공간이 개방되지 않은 시간들, 휴관일이나 운영시간 이후 또는 설치-철수 기간 등이다. 공적 기능이 일시 정지된 전시장을 돌아보며, 작가는 아마도예술공간의 역사와 함께 누적되어 온 물리적, 추상적 자취들을 추적해 발굴하는 동시에 자신의 흔적으로 뒤덮는다. 이때 작가의 행위가 남기는 궤적과 그 대상이 되는 공간의 여흔들은 지워(내)지거나 도드라(내)진다. 이와 동시에 그 바탕이 되는 틀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넘지 않으면서도, 그 조건 자체는 ‘원래 그러했던’ 대로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컨대 거친 벽면이 투박하게 벗겨지고 비교적 말끔한 벽면이 매끈하게 정돈된다 해도, 그것은 이 공간이 지닌 양가적이고 모호한 특성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그러면서도 전시 이후에도 그가 유지-개선한 상태로 남아있게 될 공간으로 인해, 향후 이곳에서 이뤄질 작업의 가능성이나 설치될 작품의 세부들은 송두리째 변화한 토대에 놓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업은 아마도예술공간의 타임라인과 규칙들의 궤적을 다루거나, 지인들 또는 이곳에서 전시할/한 작가들을 초대해 이 장소와 그 안에서의 경험에 대해 교류한다. 다만 아마도예술공간이라는 테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의 대상과 방식 역시나, 이 기관을 경유해 지시될 수 있는 미술 제도의 맥락과 그 작동을 향한 의문을 암시한다.
결국 작가의 2년 간의 프로젝트는 아마도-예술-공간의 시간에 새로운 시간을 덧대어 과거와 미래, 이쪽과 저쪽 사이에 위치한 중간 지대를 한시적으로 다시 드러나게 한다. 이는 휴지, 폐쇄와 이탈(off), 그리고 개방과 공개(on)라는 모순적 단어의 조어인 ‘오프닝 Off-ning’이라는 전시의 제목이 가리키듯, 한 시공간의 작동을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열어젖히는 것과 같다. 또 제도적 한 행사의 막을 엶(opening)과 동시에 기존의 질서와 흐름에서 잠시간 이탈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도를 향한 모든 실천이 제도적 담론에 갇히듯, 그의 작업-전시가 닫으며 열어내는 ‘새로움’ 역시나 특정한 실천 또는 이 애매모호한 시공간에 한정된 이야기로 맴돌고 말지도 모른다. 마치 그의 작업이 일상과 분리되나 끝내 일상으로 수렴되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쌓고 부서지고, 다시 쌓으며
    가만히 있어도, 또 몸부림칠수록 더 몸을 잡아끄는 늪이나 펄, 유사(quicksand)를 상상해 보자. 이내 포기하고 가라앉을 수도 있고 기를 쓰고 바닥에 달라붙어, 마찰 면적을 넓혀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 땅이 그러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동하는 지면에 빠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역설적으로 서서 있지 않아야 한다. 마치 끊임없이 걷듯이, 차분히 양발을 위로 번갈아 들어올려야 한다. 위와 아래를 바꿔 비유해 보자면 그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도 같다. 바다가 잠식해 물거품 사이로 사라지거나 바람에 불려 조금씩 날아가도, 또는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이 쓰러뜨린다 해도 계속해 바닥을 한 움큼 집어 올려 쌓아 올리는 일 말이다. 그저 허사일지도 모른다. 또 혹자는 그러한 유보적 상태는, 중립적 태도는 무엇도 쌓아 올릴 수 없다 말할 것이다. 아마 그럴 테다. 그러나 때로 이쪽도 저쪽도 향하기에 곤궁할 때, 탈출할 수도 침잠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모래 쌓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일상이, 세상이 원래 그러하다는 관념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분명한 방향과 의지로 말이다. 발에 묻어난 흙이 쌓이든 흩날린 모래가 뒤덮든, 주어진 땅의 층위는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바뀐 일상은 그로부터 다시 출발한다. 아마도, 어쩌면.

글. 곽노원(아마도예술공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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