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
2025.10.17.-11.16
박금비, 조수민, 파괴주의 인터내셔널
기획: 공간 힘(강주영, 김선영, 진세영)
공간 힘 제공
*전시 전경 / 공간 힘 제공 (사진: 주용성) (디자인: 물질과 비물질)
* 텍스트(공간 힘 제공)
조수민
<온 타임 On-Time Drawing/ Waiting>, 2023~, 59초의 드로잉과 59분 1초의 기다림, 종이에 펜, 각 29.7x42cm.
<정각을 놓친 순간 Missed Time>, 2024~, 디지털 프린트, 각 29.7cmx42cm.
조수민은 자신의 ‘미술 노동’을 측정하기 위해 시계를 소재로 선택하고, 시간에 기반한 규칙을 설정해 두 작품을 선보인다. 조수민은 일상과 미술, 노동의 경계에 질문하며 이를 공간 또는 시간이란 거대한 규율 속에서 탐구해 오고 있다. 조수민에게 ‘미술 노동’은 기존의 규율이 체득된 상태에서 그 규율을 한 겹씩 벗기고 살펴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2022년 〈홈〉 시리즈에서는 공간의 점유를 통해 흔적을 지우는 것으로, 특정 공간 속에서 지켜지는 사회제도를 드러낸 바 있다. 그렇기에 이 ‘미술 노동’ 프로젝트는 특별하지 않아야 긴 시간 지속할 수 있는, 그 자체로 일상적 행위가 되어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온 타임〉은 오늘날의 노동 조건을 규정하는 ‘시간’이라는 보편적 단위를 통해 미술 노동의 측정을 시도한 수행적 기록이다. 작가는 작업이 온전히 가능한 날들을 계획하고, 그렇게 미리 정해두었던 하루의 정각마다 정시가 유지되는 59초 동안에 바로 그 시간을 표시하는 책상 위 디지털시계 숫자를 드로잉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3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온 타임〉에서 작가는 59초라는 촉박함으로 인해서, 때론 다른 우연한 계기로 정각을 놓치기도 하면서, 그 숫자들을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다. 단순한 규칙 아래에서도 정각을 기록하는 행위는 대개 실패로 돌아간다. 24시간을 온전히 쏟아야 하기에 작업을 위해서는 먼저, 일상적인 행위를 비워야 하고, 비워진 일상에 ‘미술 노동‘이 채워진다. 작가는 ‘기다리기’와 ‘드로잉하기’라는 행위를 작업에 도입한다. 디지털시계의 숫자를 채우는 일은 아주 간단하고 반복적인 행위이며, 매 정각 작가에게 주어진 59초라는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 타임〉을 이루는 불완전한 숫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기계적 반복 행위조차 매번 다른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간이라는 단위를 통해 미술 노동을 측정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에서, 전시는 역으로 ‘측정할 수 있는 노동’이라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시간은 물류에서 생산량을 측정하는 보편적 기준이다. 물류 노동의 가치는 시간당 생산량(Unit Per Hour, UPH)으로 평가된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운반하기 위해 로지스틱스 시스템은 기계화와 자동화를 통해 끊임없이 효율을 높이고자 한다. 그러나 완벽히 자동화된 시스템 속에서도 인간의 노동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기계의 속도와 알고리즘의 정밀함이 아무리 향상되더라도, 그 속도를 유지하거나 조율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시스템의 필수적인 요소이자 동시에 그 매끄러움을 끊임없이 저지하는 존재다. 반복된 노동으로 축적된 신체적 피로, 집중의 한계와 같은 자연적 변수들은 물류의 효율을 방해하는 요소이며,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이 불규칙한 리듬 속에서만 기능한다. 조수민의 수행이 반복되는 실패로 구성되듯, 노동 또한 완전한 동시성과 자동화의 세계 속에서 언제나 어긋나고, 지연되고, 멈춘다.
모종의 짝을 이루게 되는 두 작품 가운데 전자, 〈온 타임〉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시간 내에 완수하여야만 하는 작업(Work)의 양적 미달이 마치 필연인 것처럼 현상되는 작업장의 일상화된 시간-정치적 풍경을 암시하고, 환기해 주는 듯 보인다.● 이는 작가가 거의 모든 시도에서 정해진 양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과 노동의 시공간적 분리를 위해서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시간 규율(time- discipline)을 엄수하는 노동과정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출근, 지각, 휴식 시간, 점심시간, 퇴근, 초과근무(잔업), 교대제(주간/야간 노동), 휴가 등 각종 규범이 산출되는 노동의 시간성에 작가는 스스로를 위치시켜, 그것을 재현해 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는 후자의 작품 즉, 〈정각을 놓친 순간〉이 도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조건 속에 작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조수민의 ‘미술 노동’ 시간은 순전히 자율적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결코 타인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재현 대상이 되었던 임노동의 시간성과는 근본적 층위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작가는 종래에 탈표준화(post-standardization) 된 노동시간과 작업공간 외부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그간의 규칙으로 형성해 놓은 일상과 노동의 분리와 구분이 무너지게 되어서– 방황하게 되는, 즉 자유롭도록 선고라도 받은 것 같은, 전문화된 프리랜서 노동의 시간성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만 고용되어 있고– 이마저도 운이 좋은 경우에 그렇다– 일감을 위해 항시적 준비와 대기를 하는 노동자화된 경영자와도 같은 혹은 소상공인과도 같은 정체성의 시간성에 휩싸이게 된다. ‘구멍’이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온 타임〉에서의 이러한 실패는 새로운 수행으로 이어진다. 〈온 타임〉의 반대편 벽에서 볼 수 있는 〈정각을 놓친 순간〉은 〈온 타임〉의 실패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작가는 정각의 기록에 실패한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1년 후, 다시 한번 정각의 기록을 시도한다. 다만 정각을 기다리고 드로잉하는 행위에서 주변의 공공 시계를 찾는 것으로 수행의 범위가 확장된다. 〈온 타임〉이 외부와 분리된 작가의 방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정각을 놓친 순간〉은 방 바깥의 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버스가 정각에 오지 않아 계획한 시간에 타지 못하거나, 시계탑 앞에서 정각을 기록하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이 생긴다면 정각을 기록하는 것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각을 놓친 순간의 기록마저 실패한 순간 역시 새로운 수행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실패를 통해 연쇄되는 작가의 수행은 정시가 규범이 된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어쩌면 조수민의 실패에는 ‘실패’ 대신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할지도 모른다.
조수민이 자신의 일상을 측정 가능한 단위로 반복하는 행위의 의미는 기록의 성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연한 순간들로 인해 기록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실패하더라도 조수민의 ‘미술 노동’은 1년 뒤 다시 반복될 그날을 통해 기록의 성공을 예감할수도 있다. 따라서 조수민에게 중요한 것은 같은 시간으로 조건지을 수 있는 일상을 확보하는 것이고, 확보된 시간을 어떠한 행위로든 채우는 것에 있다. 모순적이지만, 미술 작업을 위해 일상을 비워야 하면서도, 그의 미술이 지속되려면 곧 일상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통해 작가는 미술과 노동, 쓸모없음과 효율 사이의 가치를 교란시킨다. 지극히 일상적인 상태를 구축하기 위한 이 쓸모없고, 끈질긴 행위는 오히려 일상이라는 단어에 침투해있는 완전함이라는 환상에 질문하게 된다. 이처럼 ‘구멍’은 작고, 사소하고, 나약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작은 구멍 하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다른 장소와 경로, 행위들로 변형될 수 있다.
아니다, 여기엔 긍정할 확장이 이뤄지는 그 어떤 사건도 없다. 누락으로 숫자가〈정각을 놓친 순간〉으로 더해지게 되고, 그 전환 이후에 재현되는 시간에서는 사전에 마련된 계획은 있겠으나 일이 시작되고 종결되는 확정성이 무의미해지고, 개인적 경험으로 유추할 뿐인 작업의 강도나 양만이 있을 뿐 정량화된 표준 작업량이 없다. 또한 시간 그 자체로 최소한 상상적으로 가늠이나마 해볼 수 있던 노동에 대한 가치는 실적과 달성 여부로 그 측정의 기준이 변모하여 이것에 대해서라면 협상할 창구도, 투쟁의 대상도, 근로기준법의 준수 여부도, 복지 혜택도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드리워진다. 전자의 작업에서 분리해 놓은 일상과 노동의 시간 축은 진작에 휘어지고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특정 노동자 계층▲은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던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계약 관계의 바깥으로 내몰리게 되어, 이상하리만치 뒤틀린 시계가 돌아갈 뿐인, 어디가 되었든 상관이 없는 모든 장소에서 그저 자기 수행적이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노동과정의 전체성을 사유할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어느 부분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며, 사회적 관계로 발화하기 어렵게 된다. 현시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불분명한 위상에 놓인 노동자는 노동과정 내에서 겪는 일시적이지만 영원히 반복될 듯한 매번의 순간과 마주침에 대해서만 겨우내 외칠 수만 있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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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잉여노동이 발생시키는 잉여가치의 흡수와 그것의 무한한 증대가 인격화된 자본의 목적이다. 때문에 노동자의 과로 누적과 시간 부족 현상은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노동자의 노동 바로 그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예정되어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언제나 (자본가에겐) 부족한 노동일 뿐이며, (노동자에게는) 초과된 노동인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Antinomie)의 구도에서는 오직 힘으로 한 쪽의 권리가 결정될 수 있으며, 이러한 힘의 논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고유하게 전개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정치경제학비판 I [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개역판), 307~412쪽, “제10장 노동일” 부분을 참고하라.
◆ 국내 모 풀필먼트(Fulfillment) 회사의 물류 터미널과 창고 등에서 이뤄지는 상품 분류 노동의 현장에서, ‘당일배송’과 ‘새벽배송’을 성사시키기 위해 작업을 독촉하는 감시체제와 안내방송을 쉽게 떠올려볼 수 있다: “사원님들 속도 올려주세요. 다시 한 번 명단에 올라오시는 분들은 관리자들이 조치하겠습니다. 속도 좀 올려주세요.”
▲ “특수고용직·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비임금 노동자(인적용역 사업자) 규모가 처음으로 860만 명을 넘어섰다. (…) 2023년 기준 인적용역 사업소득 원천징수 대상 인원은 862만 명이다. 2019년 669명에서 4년 만에 193만 명 더 늘었다. 연평균 48만 명씩 늘어난 셈이다. (…) 이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자’로 분류돼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 3.3%를 내면서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김윤나영, 「배달 라이더 등 비임금 노동자 860만 명 넘었다...50~60대에서 더 늘어」, 〈경향신문〉, 2025.03.06.
*모든 사진 이미지 공간 힘 제공 (사진: 주용성) (디자인: 물질과 비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