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ning - 마모된 색인, 겹쳐진 켜
방재현

‘제도비판’이나 ‘대안공간’이라는 말로 전시를 묶으려 하자 작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만했다. 지금의 미술 현장에서 ‘제도비판’이나 ‘대안공간’만큼 사어처럼 들리지만, 사어가 되어서는 안 되는 말은 또 뭐가 있을까? 없다. 대신 이런 말들은 있다. 제도 밖이란 없다. 우리가 제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제도가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제도 밖으로 나가려 할수록 안이 넓어질 뿐이라든지. ‘대안’은 ‘실험’ 다음으로 미술관이 사랑하는 단어라든지. 그렇게 저렇게 사어처럼 쓰이게 됐다. 그런데 그 이후로 뭐가 더 나아졌나? 각종 비엔날레, 아트페어, 어워드, 공모전, 미끈한 공간들이 늘어났다. 늘어난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일정표였다. 전시는 계속 더 빠르게 생산되고, 그 리듬은 다시 다음 전시의 조건이 되고, 최신 담론은 별 자각 없이 고급 문화자본으로 거래된다. 제도 밖은 없다는 근사한 냉소. 그 안에도 밖은 없었다.
손사래를 치자. 지금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밖’의 여부가 아니다. 밖을 말하는 언어가 닳아버린 뒤, 안에서 어떻게 하루를 더 통과시키는가 하는 문제다. 그 통과에는 두 방향이 있다. 연명과 견딤. 둘은 서로 다른 상태라기보다, 같은 지속을 읽는 두 방향이다. 겉으로는 같은 모습이다. 둘 다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내부에서는 다르다. 연명은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표면을 덮어가며 지속하는 것이고, 견딤은 현재의 형태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지속이다. 하지만 둘은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덮음은 시간을 벌어 공간을 살리고, 어떤 벗김은 다시 전시의 표면이 된다. 연명은 표면을 덮고, 견딤은 표면을 벗긴다. 조수민의 《오프닝 Off-ning》에서 이 두 방향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은 채 같은 제스처 안에 포개진다. 그 포개짐이 전시의 주제가 아니라 전시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다.
두 번의 손사래가 겹쳐진 곳,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오프닝 Off-ning》이 열린다. 현대카드 스토리지를 지나 포르쉐 전시장을 통과하면 낡은 건물이 나타난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3층으로, 한남동 땅값을 떠올릴수록 존재 자체가 외관만큼 기이하다. 들어가기 전 잠시 2022년 중간지점에서 열린 작가의 첫 개인전 《일시적 점유 Temporarily Occupied》를 경유하자. 작가는 전시의 시간이 아니라 1년간 전시와 전시 사이의 시간을 점유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짧은 공백이었다. 원래는 청소와 유지 보수가 이루어지는 시간이었고, 작가는 그 자리를 대신 메웠다. 전시된 작품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기 흔적을 심었다. 색색깔 퍼티가 벽에 박히고, 직접 덧바른 페인트 아래 묻혔다. 자신의 전시에서야 사포질로 한 켜 벗겨 보여줬다. 하지만 그 전시도 끝나면 다시 화이트큐브로 돌아간다. 남길 수 없는 곳에 남기려는 제스처, 지워질 걸 알면서도 반복하는 일. 자리를 내주는 방식으로 자리를 점유한다. 빠르게 많이 보여주는 게 미덕인 곳에서, 그 리듬은 달랐다. 그때가 1년이었고 이번에는 2년이다.
이쯤에서 전시장으로 들어가자. 아마도의 정문이 잠겨 있다. 돌아서 쇼윈도 아래쪽 문으로 들어간다. 예전보다 멀끔하다. 화이트큐브처럼 정돈되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방과 복도의 벽들이 단계별로 벗겨져 있다. 벗겨진 벽 덕분에, 벗겨지기 전의 아마도가 오히려 선명해진다.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의 모호성을 견뎌냈던 곳. 벽은 수년간 유보와 결정을 번갈아 새겼다. 멀리서 글 쓰는 입장에선 아마도는 꽤 낭만적이어서, ‘이 공간은 어디에 속하나’ 같은 질문을 심각한 표정으로 던질 수 있고 그럴듯한 개념어도 함부로 붙일 수 있다. 그런데 벽은 생각보다 무심하다. 가까이서 보면 거리로부터 생겨난 낭만이 벗겨진다. 페인트 아래 또 다른 페인트, 그 아래 퍼티와 샌딩 자국, 어디는 그냥 못 자국과 갈라짐이 드러나 있다. 모호성은 담론이 아니라 표면의 층으로 존재한다. 유사 화이트큐브가 되려던 의지와 집을 못 벗은 몸이, 10년간 쌓인 채 극단까지 밀려나 충돌하고 재배치된다.
벽에서 이 두 방향은 먼저 물질이 된다. 아마도가 10년간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을 유지해온 방식 중 하나는 표면을 덮는 것이었다. 페인트 위에 페인트, 퍼티 위에 퍼티. 그것은 공간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결정을 유예하면서 계속해온 연명의 형태다. 그런데 그 덮음이 10년 동안 반복되며 공간을 실제로 지속시켰다는 점에서, 연명은 견딤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그 벽을 벗기는 행위는 연명의 켜를 드러내고, 그동안 결함처럼 덮여 있던 흔적들을 공간의 시간으로 다시 읽게 한다. 물론 벗기는 일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벽은 드러나는 순간 다시 전시의 표면이 되고, 상처는 읽히기 좋은 상태로 배열된다. 그럼에도 이 벗김은 덮여 있던 시간을 사라진 것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아마도는 이제 이렇게 생겼다. 벽을 벗기며 생겨난 분진을 상상해 본다.
위층에는 타임카드 95장이 있다. 2023년 7월 12일부터 2025년 9월 19일까지, 첫 미팅부터 오프닝까지 약 2년의 기록이다. 카드 양식에 다섯 항목이 있다. MAIL, CONTACT, MEETING, WORK, EXHIBITION. 타임카드는 본래 노동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출퇴근을 기록하고 임금을 산정하고 효율을 측정하는 데 쓰인다. 그 양식에 예술 노동의 시간을 채우는 순간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한다. ‘WORK’는 ‘작업’이다. 그보다 많은 나머지 넷, 메일, 연락, 미팅, 전시는 작업을 둘러싸고 있지만 작업 자체는 아닌 시간인데, 이것들이 타임카드 위에서 WORK와 나란히 칸을 차지하는 순간 위계가 흔들린다. 미술계는 주로 오프닝으로 시간을 센다. 전시 이력에 적히는 건 전시 기간과 장소뿐이다. 2025, 아마도 예술공간. 그 앞의 2년은 어디로 갔는지 묻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타임카드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양식은 무엇이 노동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정의하는 관료적 도구인데, 작가는 그것으로 노동이지만 작품의 시간으로 잘 분류되지 않는 것들을 세고 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가시화한다’는 선언과 다른 이유는 가시화의 방식에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시간 칸을 가로지르며 사진이 붙어 있고, 드로잉이 끼어 있고, 메모가 삐져나온다. 타임카드 양식이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그 위에 쌓이면서 양식 자체를 포화시킨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기록은 시간을 정리하지 않는다. 정리하려는 양식 위에 정리되지 않는 시간의 잔여를 계속 얹는다.
타임카드는 지속을 다른 방식으로 겹쳐 놓는다. 그 양식을 쓰는 것은 미술 노동을 관료적 시간 단위로 환산 가능한 것처럼 다루는 연명의 제스처다. 그러나 그 양식 위에 사진과 드로잉과 메모가 쌓이는 것은 환산 가능한 시간의 표면을 넘치게 만드는 견딤이다. 작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한다. 양식을 버리지도 않고, 양식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CV에 남지 않는 시간이, 남기도록 설계되지 않은 도구를 통해, 남는다.
2층 끝의 타일 방. 퍼티도 페인트도 그라인더도 잘 안 먹는 곳이다. 10년 치의 못 자국, 테이프 자국, 긁힌 자리들이 점으로 흩어져 있다. 흩어진 점들에 좌표가 붙는다. 타일 줄눈을 x축과 y축 삼고, 구멍들의 서로 다른 깊이를 z축 삼는다. 추적하면 출처가 붙는다. 어떤 해, 어떤 전시, 어떤 작업. 연도별로 색이 다른 인덱스 탭. 초록, 파랑, 분홍. 작가가 붙인 출처를 보기 전에, 구멍들의 관계를 먼저 유추해 본다. 두 개가 가깝게 나란히 뚫려 있으면 40호 캔버스였을지 모른다. 네 개가 사각으로 뚫린 곳은 27인치 모니터일지도. 못 자국이 겹쳐 있는 곳은 여러 작업이 번갈아 남긴 흔적일지도 모른다. 부재가 최소한의 형태를 갖기 시작한다.
작가도 끝까지 못 찾은 구멍이 있다. 그 자리에는 설명이 아니라 공란이 남는다. 출처 불명은 오류가 아니라 표기되지 않는 방식으로 범주가 된다. 덕분에 아카이브는 완결되지 않는다. 한 점씩 세다 보면 어느 순간 세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데, 그 포기가 이 작업에서는 실패가 아니라 도달점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거기에 있었는지를 복기하려다가 무엇이 여기에 남는지로 착지하게 되는 것이다. 타일 벽은 배경이 아니다. 색인이다. 읽을 수 있게 남아 있다. 다 읽히지는 않게.
연명이 곧 견딤인 자리에서, 헐벗은 벽을 만지며 현재에 남아 있던 다른 과거들을 찾아낸다. 닳아도 덮여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10년 전 퍼티 자국, 한 달 전의 메일 기록, 언제 뚫렸는지 모를 구멍들. 따로 보면 흩어진 점들이고, 연결되지 않은 채 각자의 시간에 못질돼 있던 것들인데, 이 전시는 그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 잇는다. 아마도의 지금은 완성된 아카이브가 아니라 끝내 닫히지 않는 색인함에 가깝다. 어떤 구멍에는 연도와 이름이 붙고, 어떤 자리는 끝내 공란으로 남는다. 타임카드는 지나간 시간을 다시 출근시키고, 벗겨진 벽은 사라졌다고 처리된 흔적들을 표면으로 돌려보낸다. 구멍은 늘고, 출처는 흐려지고, 페인트의 켜는 서로를 덮는다. 작가는 이 비가역적인 흐름을 완전히 지우지도, 봉합하지도 않는다. 다만 타임카드와 좌표, 색인 탭으로 잠시 묶어둔다.
《오프닝 Off-ning》은 과거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지 않는다. 이 공간이 무엇으로 유지되어 왔는지, 무엇이 닳으면서도 계속 남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아직 읽히지 않은 채 다음 전시의 조건으로 넘어가는지를 세어 본다. 오프닝에서 오프닝으로 달려가던 리듬을 어긋나게 하면서. 밖으로 탈출하지 않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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