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하다. 무용하다. 이미 있다.
정강산(독립 연구자)

“개념규정과 실재 사이의 모든 긴장은
어떤 개념규정의 내재적인 긴장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물론”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들 긴장 혹은 적대가
본질적이며 환원불가능 하다는 점에,
우리가 결코 어떤 “순수하고” 완전히 현실화된
개념적 구조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¹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상자에 구멍을 뚫는 사소한 실천의 배면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 단순함과 소박함을 고려할 때, 작업장 내에서의 간단한 노사 합의로 관철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효한 운동은 낭만적인 기대나 환상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과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동시에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마트에서 취급하는 모든 상품은 전국 각지의 입점 거래처가 보내오는 ‘박스’를 경유하며, 이들 상품이 마트의 창고에 ‘재고’로서 정리되고 진열대에 배치되기까지는 다시 수백 번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상자는 생산된 상품을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도록 그 이동과 교환을 담당하는 유통업계의 알파-오메가, 곧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이 간단치가 않은 까닭은 이처럼 ‘상자’가 로지스틱스(logistics; 물류)의 핵을 구성하기 때문이다.²
그래서 우리는 2019년 마트 노동자들이 신체적 편의를 위해 상자에 구멍을 뚫어 달라는 ‘소박한’ 요구를 공론화했던 배경에 마트노조의 ‘진중한’ 조직화 사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요컨대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마트 노동자들이 공통의 요구를 내걸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난관을 돌파해야 하며,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다.
a) 마트 특유의 고용 파편화: 익히 알려져 있듯 계산대·청소·보안·식품코너·상품하역 등 대부분의 직무가 용역·위탁·협력업체에 의해 이뤄지며 마트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는 매장운영·재고관리·신선식품 등 일부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다. 이 같은 조건에서 노동자들은 다양한 고용형태로 각기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에 공통적 기반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b) 높은 이직률과 비정규직 비율: 저임금, 단기계약직, 시간제, 주말·야간 노동이 보편적인 조건에서 노동자들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노조의 골간이 되는 조합원이 일정 기간 유지되지 못한다면 조직적 힘이 쌓이지 않는다.
c) 대형 유통업체들의 유구한 노조 무력화·무노조 경영 전략: 노조 결성 조짐이 보이면 부서를 재배치하거나, 계약직 비중을 늘려 조직 기반을 약하게 만들고, 교섭권을 약화하기 위해 외주화를 확대하며, 노조 가입자에게 차별적 처우와 함께 인사상 압박을 가하는 등 사측의 ‘메뉴얼’은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일체의 집단적 기획을 손쉽게 무력화한다.
d) 마트의 불균일한 근무구조: 마트 노동자들 대부분은 근무시간과 휴일이 매번 변동되는 실질적 탄력근무제라 서로 얼굴을 볼 시간이 거의 없다. 설령 짬이 나더라도 고객 클레임 예방을 명목으로 ‘두 명 이상 뭉쳐있지 말 것’ ‘근무 중 사담 자제’ 등 현장의 강도 높은 관리 규율로 인해 동료 간 신뢰를 쌓고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적다.
다시 말해 이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때야 마트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상자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소박한 요구를 내걸 수 있는 셈이다. 작업장의 영역을 넘어선 급진적인 정치경제적 실천은 이 같은 소박한 필요를 집단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정치적 효능감을 지속적으로 쌓을 때 비로소 가닿을 수 있는 최대강령(maximum programme)의 차원에 자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요구가 소박하다 해서 그것이 곧바로 수용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고용주와 경영자는 노동자로부터 비롯된 일체의 요구를 ‘소요’로 체감하며, 그들 노동자가 다만 시키는 대로 움직이길 원할 뿐 기지를 발휘하여 변수를 만들어내길 원치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말 그대로의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다. 이는 작업장 내의 셀 수 없이 많은 ‘소박한’ 요구들이 대개 가볍게 무시당하며,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무마되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박스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노동자들의 간명한 요청이 마트 자체의 브랜드 상품 일부에 제한적으로나마 적용되었으나 마트에 출입하는 모든 박스에 적용되지 못한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선 그것은 노동자들의 조직된 힘이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다. 마트 노조가 수십 킬로그램의 박스를 하루에 수백 번 들고 나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 등을 쟁점화함으로써 사측에서는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마트 자체 상품에 한해서나마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을 가능케 한 동력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본주의 전체 물류 산업의 차원에서 구멍이 뚫리지 않은 박스란 여전히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외부효과에 불과한바 노동자들의 미래 건강을 볼모 삼아 당분간 지속해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그런 점에서 ‘상자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요구가 일정하게 수렴되고, 또 좌초되는 과정 전체는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계급적 역관계(class balance of forces)의 반영이다. 그와 같은 사소한 요구는 그 자체 동시대의 계급투쟁이 궁극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조건이자 계급투쟁이 그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장소인 셈이다.

구멍 앞에서 분기하는 세 개의 테제
‘공간 힘’의 기획 전시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2025.10.17.-11.16.)는 이 같은 하나의 사태 앞에서 분기하는 시선들에 초점을 맞춘다.
특기할 만한 것은 본 전시가 공동 기획으로서 공간 힘의 큐레이터 3명(강주영, 김선영, 진세영)이 동일한 책임과 권한을 나눠진 채 진행되었다는 점인데, 그리하여 예의 ‘분기하는 시선들’은 각 큐레이터가 강조하는 상이한 착안점들로 구성된다. 달리 말해 세 명의 큐레이터는 ‘상자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가’라는 화두 앞에서 각자 자신의 대답을 제시한다.
예컨대 김선영은 ‘구멍’에의 요청을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자생적으로 벼려낸 미시적(micro) 수준의 저항으로 규정하며, 그것이 지닌 잠재력과 급진성에 주목한다. 삶의 재생산 전체가 걸려있는 작업장 내부에서는 “한마디의 불평조차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에서 ‘구멍’은 곧 개별 노동자들이 누적한 미시저항이 분명하다”는 것이다.³ 여기서 노동자들의 실천은 그 크고 작음을 떠나 그 자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조형해 갈 생산적인 에너지로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바, 별도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거나 재단될 필요 없는 자기 완결적인 실체로 조명된다. 이러한 미시적 실천들은 거대한 변혁의 서사에 종속되지 않은 채, 구조의 내부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또 다른 질서의 가능성을 조용히 예비한다.
반면 진세영은 ‘구멍’에의 요청에 내재한 한계를 강조하며, 그와 같은 소박한 요구는 기존의 제도를 윤택하게 하거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현 체제를 다듬어냄으로써 결국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논리에 포섭될 운명이라 본다. 이 같은 생각은 “상자가 한 층 더 나르기 편해졌으니, 속도를 더 올려도 되지 않겠냐는 상상이야말로 더 현실적인 감각”이라는, 구멍을 뚫어낸 상황 이후를 가정한 표현에 압축되어 있다.⁴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 국소적인 수준에서의 실천은 자족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으며, 모든 실천은 자본의 논리를 유효하게 제한할 수 있는지에 비추어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강주영은 ‘구멍’에의 요청으로부터 오히려 인간의 신체성이라는 절대적 제약을 넘어서지 못한 자본의 한계를 발견하며, 그와 같은 한계들이 현재의 세계 안에 이미 주어져 있음을 살피고자 한다. 작업장에서 소박한 저항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은 자본이 인간의 몸을 자신의 구상대로 온전히 전용하지 못했다는 증표이며, 자본의 적은 자본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강주영은 “택배 상자를 물류센터, 컨테이너, 로지스틱스 도시로 확장해 상상할 수 있다면, [박스의] 손잡이 구멍은 물류 노동의 세계 자체에 내재한 다양한 구멍들로 치환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곧 상자 너머의 다기한 ‘구멍’들을 동시대 물류 시스템의 도처에서 발견하자는 제언으로 이어진다.⁵
본 전시의 형식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구멍’을 둘러싼 이 같은 세 가지 논제가 작가들의 작업을 특정한 방식으로 맥락화하는 복수의 의미론적 닻을 형성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 큐레이터의 관점이 개별 작업(작품)을 어떻게 아우르는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요컨대 관객은 이들 중 최소한 하나의 관점에 이입하며 작업을 독해하거나, 가능하다면 셋 모두의 관점에 접속한 뒤 이들의 통일체로서의 전시가 종국에 어떤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메타(meta-)적 수준에서 반성해야 한다.
덧붙여 ‘상자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가’를 묻는 직관적이고 실질적인 전시의 착안점에 비해 아래 서술할 작가들의 작업이 지닌 추상 수준이 다소 높게 느껴진다면, 예의 ‘구멍’을 소여의 질서 너머의 외부성을 향한 작은 실천에 대한 환유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 달리 말해, 구멍은 균질한 힘의 장력을 뚫고 나간 작은 송곳의 흔적 같은 것으로 확장되어 독해되는 편이 좋다. 이 경우 우리는 외부를 허용하지 않는 장력과, 외부를 향해 난 틈의 형태와 크기를 비롯하여 그것의 일반적 의미 등을 입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격자 속에서 새어 나오는 순간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박금비, 조수민, 파괴주의 인터내셔널(The Destructionist International)으로, 이들은 각각 동시대의 감각적 규율을 사색하고, 준수하며, 위반하는 작업을 제시했다.
2층 전시장에서 전시의 첫 번째 동선을 채운 조수민의 작업은 <온 타임>(2023-)인데, 이는 A3 규격(29.7x42cm)의 종이에 디지털 시계가 표시하는 정각의 시간들을 펜으로 그린 드로잉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 작업의 영어 버전 제목 ‘On- Time Drawing/Waiting(온 타임 드로잉/웨이팅)’이 암시하듯, 여기서 핵심은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지는 드로잉과 기다림이다.
조수민은 하루 24시간 동안 작업이 가능한 날을 선정하여, 그날의 매 정각을 하나의 종이에 그려 옮기되, 정각이 유지되는 60초의 시간 동안만 해당 작업을 지속했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경우 24개 정각 단위가 전부 표시된 ‘디지털 정각 드로잉’이 만들어지게 될 테지만, 그와 같은 규칙이 무관하게 종이들은 듬성듬성하게 비워져 있다.
이는 조수민이 작업을 진행하는 임의의 규칙을 수립한 시점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인데, 약 1분의 시간 동안 디지털 시계의 정각을 완전히 드로잉 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24시간의 매 정각을 일정한 방식으로 통제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시간에는 알람을 듣고 일어나지 못한다면 드로잉을 놓치게 되고, 설령 깨어있는 순간이라 해도 무언가에 몰입하거나, 옆에 챙겨야 할 사람이 있거나, 정시를 잊어버릴 경우 ‘정각을 정각에 기록한다’는 규칙은 관철될 수 없다.
한편 이와 대구(parallelism)를 이루는 작업으로 제시된 <정각을 놓친 시간>(2024-)은 <온 타임>에서 놓쳐버림으로써 공란으로 남겨진 정각을 채우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도 조수민은 임의의 규칙을 부여하는데, 놓친 정각의 시간으로부터 1년 뒤 같은 시간을 기록하되, 매번 다른 외부의 공공 시계를 찾아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예컨대 2023년 5월 1일 오전 6시의 정각을 놓쳐 드로잉에 해당 시간이 빠져있다면, 그 부분을 1년 뒤 공원이나 역사 등에 설치된 공공 시계를 찾아가 촬영하는 방식으로 놓친 시간을 만회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수민이 수립한 규칙에 필연적인 이유나 당위가 있는지를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우리가 시간을 쫓으며, 시간에 쫓기는, 또한 시간에 의해 지배되며 시간에 의해 분절된 세계를 산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때 시간이란 널리 알려진바 근대 혹은 자본주의 이후 적시 생산과 유통을 위해 발명된 제1의 규율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 강박의 재현처럼 보이는 조수민의 <온 타임>과 <정각을 놓친 시간>은 자발적으로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작업의 시간이란 본래 계측 및 측정 가능한 정량적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창발적인 시간이며, 이로써 세계에는 정량화된 시간에 매개된 노동을 응축한 ‘상품’과 구별되는 ‘작품’이 있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예술을 통한 일말의 ‘구멍’과 같은 것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조수민은 이 같은 표준적 시간 규격 외의 ‘작업의 시간’을 애써 부정하며 편집증적인 계측을 시도하는바, 계측 과정에서 세운 임의의 시간적 규칙을 스스로 철저히 준수하는 장면은 어떤 측면에서 가혹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창발적인 작업의 시간은 점차 한 사회 내에서 온전한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임금에 매개된) 노동의 책임을 다하는 시간과 같이 의무적인 것으로 전화(transformation)된다. 그러나 그처럼 시간적 규율에 복종하려는 시도와 자신을 온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앞서 서술한 우연한 계기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현대의 제1규율- ‘시간 엄수’를 관철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산만하고, 피곤하며, 또한 자유로운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본 전시 내 조수민의 작업은, ‘구멍’을 메우는 시도를 통해 구멍의 현전(presence)을 드러내는 재귀적 수행으로써 큐레이터들의 문제설정에 응답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데올로기와의 과잉된 동일시는 결국 그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공식적 규범(‘어떤 경우에나 정시를 엄수하라’)과 실제 작동방식(‘당신이 시계를 부숴버리지 않을 수 있는 한에서 정시를 엄수하는 시늉을 하라’) 사이의 괴리를 폭로함으로써, 주체를 끝내 포섭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을 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규율의 틈에서 태어나는 반역의 시선
지하 전시장에서 다음 동선에 놓인 것은 <구멍: 화물 절도 연대기(Breached: A Chronicle of Cargo Theft)>(2024)로, 이는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의 15분짜리 영상 작업이다. 가벽으로 난 창을 넘어 비스듬하게 관람하도록 배치된 이 작업은 그 관람 방식에 어울리게도 탈취와 위반의 감각이 자라나는 순간을 그려 보인다.
영상은 한 무리의 인간들이 로스앤젤레스 링컨하이츠에서 화물열차를 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어느 블로거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은 습격이 일어난 장소를 방문하여 거기서 오가는 열차들을 촬영하며, 블로거의 일기를 재구성한다.
소년 구금시설의 주방에서 일하는 영상 속 화자는 매일 환멸감에 시달리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힘겹게 출근을 이어가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열차를 탈취하는 이들을 우연히 목도한 뒤로 그는 규칙을 스스럼없이 부수는 도둑들의 대담함에 매료된다. 재화는 무릇 시장에서 화폐를 통해 구매되어야만 한다는 자본주의의 규율이 우주의 법칙과 같은 것이 알게 되는 일은 그에게 새삼스럽다. 정치인들이 절도 현장을 방문하여 도둑들을 규탄하고, 철도 인근으로 더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들어서지만 그는 이미 안전한 질서의 감각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종국에 그는 화물 도둑들의 시선으로 도시의 빈틈과 감시의 사각지대를 관찰하며, 규율을 위반하는 실천에 완전히 동화된다. 그리하여 화물열차를 탈취한 이들을 목격했던 바로 그 자리에 서게 된 화자는 자신의 바로 한 발자국 앞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흥분 속에서 예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성기고 급하긴 하나, 한 ‘건실한’ 인간이 반역의 길로 접어드는 압축적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는 주체성의 변화와 관련되는바, 화자는 자본주의가 조형하는 균질한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이 실은 일순간의 결단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뒤 더 이상 과거의 안온한 삶을 욕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은 ‘사적 소유의 불가침성’과 ‘상품의 신성한 순환’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초월적인 규준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이 묵묵히 노동하고 화폐를 받아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일상의 수행’ 속에서만 힘겹게 지켜지며, 누군가 그와 같은 수행을 거부하는 순간 곧바로 제 바닥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어떤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선험적인 법칙이라기보다 행동 속에서만 재현되는 현실의 질서다.
물론 헤겔(Hegel)식 표현을 빌자면, 영상 속 화자가 이입한 약탈과 같은 것은 굳이 낭만화할 필요가 없는 추상적 부정(abstract negation)에 그친다는 사실을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사적 소유의 불가침성’과 ‘상품의 신성한 순환’을 멈추는 방법은 파업, 고의적 저성과, 항만 점거, 불매·보이콧(boycott), 사보타주(sabotage), 증여, 공유 등 얼마든지 규정적 부정(determinate negation)의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부정에는 다만 현재의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거부의 의지가 존재할 뿐,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지에 관한 긍정적인 의지는 부재한다. 달리 말해 파괴의 욕망은 있지만 구축(construction)의 욕망은 없다. 그래서 조직된 힘으로 움직이는 규정적 부정의 실천과 달리, 추상적 부정의 실천은 흐트러진 개인들의 산발적 반항으로 명멸하게 될 따름이다.
영상의 화자 역시 공들여 만든 재화를 남에게 빼앗기긴 싫을 것이지만, 자신의 행위가 어떤 후과를 불러올지를 차분히 숙고하기보다는 홀로나마 균질한 자본주의적 질서에 침을 뱉는 당장의 흥분이 그에게는 더 강렬하게 체험된다.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은 그렇게 다소 퇴폐적인 방식으로 ‘구멍’을 만들어 보이며, 현실의 장력에 구멍을 내는 추상적 부정의 실천에 내재한 달콤함을 설파한다. 그 같은 구멍의 모양은 거칠고 두서없지만, 최근 수십 년간 규정적 부정이 처해온 난관을 고려할 때,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이 매료된 부정의 양상이 나름의 동시대적 현실성(reality)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란 어렵다.

비워진 중심과 세 개의 빛: 공허의 정치적 감응들
한편, 박금비는 3채널 영상 <맛있는 도넛 만드는 법>(2025)을 통해 ‘구멍’을 사색하며, 구멍을 둘러싼 직접적이고도 느슨한 시론을 펼쳐놓는다. 빨강, 초록, 파랑은 각 영상의 주요 색상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에 3채널 각각은 ‘R(ed)’, ‘G(reen)’, ‘B(lue)’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뉜다. 여기서 우리는 R-G-B 순이 아니라 G-B-R 순으로 작업을 살펴보기로 한다.
G) G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화자가 오랜 친구 혹은 과거의 연인에게 보내는 내밀한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최근 홍콩의 삼수이포(Sham Shui Po)에 위치한 원룸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액세서리를 만드는 부업을 구해 집에서 조립을 하고 있다는 근황을 비롯, 원룸 전문 인테리어 업체에 가구 배치를 맡겼다가 가구에 창문이 가려져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풍경 사진을 대신 설치했던 해프닝 등을 시시콜콜하게 얘기한다. 일견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의 진술로 여겨지는 서사는 창문이 상실될 정도의 주거 공간의 축소, ‘부업나라’를 통한 저임금 플랫폼 노동 등을 경유하여 열악한 사회적 실재를 암시하며, 개인의 삶이 공간·노동의 전 영역에서 구멍처럼 비워지고 있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본인이 “드디어 구멍이 되어 버린건가?”라고 자문하는데, 이때 구멍은 사진으로 대체된 창문에서 보이는 감각적 폐색감과 불안정한 노동이 삶 전체를 잠식함으로써 존재 감각이 희미해지는 사태의 알레고리와 같은 것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동시에 화자는 편지의 수신인과 함께 참여했던 과거의 정치적 사건을 시사하며 ‘구멍’을 전복적인 의미로 다시 비튼다. 액세서리를 조립하거나 3D 인테리어 시뮬레이터로 원룸을 꾸미는 장면에 이어 소환된 ‘그날’의 기억은 감시카메라에 레이저를 쏘며, 래커(lacquer)를 칠하고, 우산을 덮어가며 규율을 교란하는 시위의 장면들이다. 2014년의 홍콩 시위를 촬영한 푸티지들과 함께, 화자는 “우리는 통제에 저항하는 것이 구멍이라면, 차라리 구멍이 되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어”라며 서점에서 ‘불온한’ 모임을 이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구멍은 감시와 규율을 뚫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으로 다시 조명되는바, 통제를 무력화하는 균열에 가까운 의미로 정립된다.
B) 한편 B는 한국의 화자가 G에서 등장한 홍콩의 화자에게 보내는 답장의 형식을 취한다. B의 화자는 자신이 시청에서 사무보조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그 일이 다만 공무원들의 업무에 필요한 문서를 날라주기만 하면 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임을 거듭 강조한다. 시 당국자들의 근무 효율을 위해 인간 셔틀이 되는 일은 어떤 고양감도 없이 정신을 멍한 상태로 유지하기에 적합하다. 때로 시청 인근에서 시위가 있는 날이면 문서실이 있는 본청까지 가는 동선이 꼬이는데, 그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만 화자는 멍한 눈을 추스려 자신의 일에 대해 환기할 수 있다. 그가 문서실에 다녀오는 길에 시위 현장 주변을 맴돌며 왜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신의 일에 다만 공허함을 느끼는 화자는 결국 더욱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로 하며, 이는 중국의 ‘탕핑족’과 같은 극단적인 수동성을 취하는 일로서 ‘구멍’을 자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R) R의 화자는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인간 노동의 가치가 소멸하는 와중에 비인간 대상(나비·야생화·소·귀걸이·공간 등)의 가치가 상승하는 과정을 비평적이고 메타적인 언어로 사색하고 있다. 비인간 대상은 이동할수록 더 비싸지고, 더 희귀해지며, 더 주목받지만, 인간은 이동할수록 더 값싸지며, 흔해지고, 지워지는 전도 앞에서 화자는 ‘인간은 자본이 통과하는 “구멍”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여기서 ‘구멍’인 인간은 자본의 앞에서 속절없이 뚫려있는 말 그대로의 ‘도관(conduit)’인바, 중심이 텅 비어 있음으로 하여 완성되는 도넛과 같은 형태로 비친다.
한국의 70년대 아파트 설계에 반영된, 가정부가 더부살이를 할 수 있는 ‘식모방’과 주중 고된 노동을 마치고 주말 홍콩 빅토리아 파크(Victoria Park)에 모여드는 가사도우미의 존재는 화자에게 구멍이 된 인간의 양상을 드러내는 예시로 나타난다. 자본의 순환은 공간의 계급적 분할과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을 거쳐 인간을 비워내며 관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비인간의 가치 역전이 그 한계를 넘길 때, 다만 자본의 통로로 기능하던 인간-구멍은 느닷없이 막혀버린다. 구멍이 메워지는 순간은 약탈, 폭동, 공황, 혁명의 순간인바, 여기서 인간은 일시적으로나마 수동적 도관이길 그치고 중심부가 채워진 온전한 형상을 되찾는다. 화자는 이 같은 과정을 은유로 점철된 잠언의 형식으로 진술하다, 종국엔 ‘이제 구멍을 뒤집으라’고 요청한다.
영상 도처에서 등장하는 웜홀(wormhole)의 이미지는 ‘구멍’의 중층적 의미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인간이 자본의 도관인 동시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라는 화자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맛있는 도넛 만드는 법>에서 R, G, B 각 영상은 상이한 화자들의 시선을 통해 ‘구멍’이라는 개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멍은 G에서 ‘결핍’과 ‘통제로부터의 탈주’라는 이중적 의미로, B에서 체제를 교란하는 무기력과 틈새에 머무는 태도로, R에서 자본의 도관이자 혁명의 조건인 인간으로 분기한다. 그런 점에서 박금비가 3채널을 ‘RGB’ 단위로 분할한 것은 하나의 세계(공간·노동·정동의 체제)가 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서사들의 중첩과 결합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형식적 표현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RGB라는 분리 속 통일은 ‘구멍’의 다성성(polyphony)과 복수성을 적시하며, 서로 다른 채널의 경험이 결합될 때만 전체적인 사태의 스펙트럼이 드러남을 환기하는 것이다.

분리된 문장과 하나의 세계: 형식으로서의 다성성과 구멍의 해석학
한편으로 박금비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사태의 다성성에 관한 강조는 본 전시의 큐레이터들이 취하고 있는 전시의 형식을 압축하여 반복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에서 큐레이터들은 전시 서문을 비롯, 개별 작업의 가이드 텍스트까지도 각자의 상이한 강조점을 보존하며 단일한 결과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 서문에서 각 큐레이터의 문제설정이 적시된 문장이 노랑, 주황, 분홍의 배경으로 다르게 구분되어 표현된 것과 마찬가지로, 작업 가이드 텍스트 역시 큐레이터 각자가 작성한 문장이 노랑(김선영), 주황(진세영), 분홍(강주영)의 강조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문장은 그 나름의 유기적인 질서 속에서 때론 중복되고, 경합하면서 하나의 글로 소급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단번에 직관적인 결론으로 가닿지 못한 채 각 작업을 안내하는 여러 인도자의 심상을 서성이게 된다.
‘구멍’을 미시저항으로부터 비롯된 충만한 파열로 읽는 김선영에게, 조수민의 <온 타임>과 <정각을 놓친 시간>은 ‘정각의 누락’, ‘공란’, ‘놓침’을 통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실패로써 미시저항의 계기를 담지할 것이다(이는 모든 부조리와 폐습까지도 복무 규범에 따라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FM’ 캐릭터가 군대 문화의 실질적 저항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 실패는 단순한 실수나 태만이 아니라, 규율이 요구하는 완전한 주체화를 구조적으로 수행할 수 없음을 폭로하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조수민이 1년 뒤 공공 시계를 찾아가 놓친 공백을 되메우는 과정 역시 규율을 복원하려는 의지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이미 규율의 균열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조수민의 실천은 규율적 시간에 균열을 내는 ‘구멍’이며, 시간 이데올로기의 불안정한 토대를 노출시키는 작은 파열점이 되는 것이다.
파괴주의 인터네셔널의 <구멍: 화물 절도 연대기>에서 김선영이 강조하는 미시저항의 계기는 건실한 소시민 화자가 일상의 규율 속에서 가장 사소한 균열(우연한 목격, 감정의 동요, 시선의 이동)을 통해 자본주의적 현실원칙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과정에 있다. 여기서 핵심은 약탈이라는 폭력적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목격한 순간, 그리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감각적 동요와 내적 재배치다. “재화는 시장에서 구매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더는 ‘자연법’으로 느껴지지 않게 될 때, 화자는 규범의 신성성에 감흥을 잃고 화물 도둑의 시선으로 도시의 빈틈과 구멍을 관찰함으로써 체제를 떠받치는 일상의 수행(출근, 규율 준수, 합법적 소비 등)을 느슨하게 만든다.
이어 박금비의 <맛있는 도넛 만드는 법>은 각 화자들이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감각적 균열, 정동의 미세한 반전, 무기력 속의 틈새 같은 사소한 변화들에서 발생하는 미시저항을 보여준다. 이는 G의 화자가 자본주의적 거주 및 노동 조건의 압박이 빚어낸 허기와 공허의 상태에서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당국의 규율을 교란했던 기억으로 급작스레 정동적 도약을 하는 순간에, B의 화자가 시위대를 만나 무기력의 완전한 내면화가 깨진 아주 작은 접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거부를 결심하는 순간에 내재한다.
한편 진세영은 ‘구멍’으로부터 자본의 간사한 지혜에 의해 속절없이 전유될 운명을 읽는바, 그의 시선에 충실하자면- 정각에 드로잉을 수행하고 놓친 정각을 공공시계의 촬영으로 보충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조수민의 작업은 자본주의적 시간 규율의 정확한 미메시스(모사)일 뿐이다. 조수민의 행위는 규율의 준수가 실패하는 순간조차 자기조절적 만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규율의 회로 안에 귀속된다. 즉, 그는 규율의 실패를 통해 규율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규율을 다시 복원하는 순환적 실천을 되풀이함으로써 자본주의 시간체계의 ‘회복력(resilience)’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은 어떤가? ‘도둑들의 시선에 동화되는 화자’의 각성 과정은 이미 오래전 자본주의 문화산업이 기계적으로 재생산해 온 ‘반항의 서사’를 반복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반역의 정동조차 상품화하고, 일탈의 서사조차 팬덤화하며, 위반의 감각조차 재현 가능한 이미지로 저장한다. 화물 탈취의 스릴은 곧 소비 가능한 정동 패키지로 전환될 뿐이며,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의 영상은 그 패키지를 미적으로 정련해 보여주는 데 그친다. 어쩌면 진세영은 영상이 포착한 ‘구멍’이야말로 바로 자본주의가 가장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이라고도 주장할 것이다. 그와 같은 구멍은 ‘체계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로 활용됨으로써 더 강력한 감시·보안 장치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박금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작업은 세 화자의 개별 서사를 통해 ‘구멍’의 다의성과 정치성을 나름대로 조직해내지만, 결국 그 모든 분기들은 자본주의가 미리 예비해둔 정서적·담론적 회로 안으로 안전하게 귀결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G에서 등장하는 피로와 결핍의 감정, 탈진된 일상의 이미지들은 여러 개인적인 감정 여행을 독려하는 경험 패키지의 양분으로 소비된다. B의 화자가 보여주는 ‘무위’에의 모색은 구조 변화 없이 사회적 소진을 개인의 방식으로 ‘처리’하게 함으로써 체제가 오히려 자신의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무기력의 영역을 일종의 ‘내장된 완충지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몸 자체가 자본을 제약하는 ‘구멍’으로서 세계의 도처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음을 강조하는 강주영은, 조수민의 작업에서 보이는 드로잉의 공백을 자본이 끝내 메우지 못한 구멍으로 읽게 될 것이다. 정확히 60초 동안 정각을 그리는 일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시간 준수의 미세한 모델의 반복이지만, 그 규칙은 잠, 피로, 방심, 생리적 필요, 돌봄의 행위 등 신체가 요구하는 리듬의 끈질긴 개입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너진다. 그 결과 종이는 듬성듬성 비어 있게 되고, 시간의 공백은 작가의 실패라기보다 인간의 기계화를 꿈꾸는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불가능을 가리키게 된다.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의 작업 역시 자본주의가 전제하는 편집증적인 시간-공간적 규율이 인간의 신체적 조건을 통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비친다. 화물열차가 일정한 주기로 운행되고, 그 화물들이 “정상적인 시간표”에 맞추어 소비자에게 도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시간체계는 기계적 리듬의 세계다. 그러나 이 체계는 인간 신체의 시간성—생계의 단조로운 반복에서 오는 피로와 무기력, 충동, 욕망—에 의해 흔들리고 파열된다. 영상의 화자는 이를 직접적으로 체현하여, 자본의 시간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인간 신체의 돌출적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금비가 보여주는 화자들 또한 자본이 인간의 생체적 조건을 무한히 초과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균열의 표면이 된다. G에서 홍콩의 화자는 축소된 원룸, 창문이 가려진 실내, 반복적 수공업으로 신체적 고양감을 침식하는 환경에 놓여있다. 이는 몸에 내재한 생체적 한계의 틈으로서, 그 틈에서부터 과거의 정치적 감각과 실천은 거듭 호출될 수밖에 없다. 한편, B의 화자는 관료 조직의 효율을 위해 ‘인간 셔틀’이 되는 노동을 수행하며, 임노동이 신체를 도구적 시간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통해 둔해진다. 이때 화자의 멍한 상태는 무의미한 일(bullshit job)에 신체가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생리적 이입의 실패에 다름 아니며, 극단적 수동성으로 이어지는 화자의 실천을 예비한다.

동일성과 분열 사이에서 실재의 틈을 따라가기: 원환(torus) 위의 구멍들
이처럼 작업들을 하나의 줄기로 엮어내는 각 큐레이터의 서사가 동등한 위상에서 비중을 갖는 전시 구조상, 우리는 분기하는 큐레이터들의 입장을 헤집으며 ‘구멍’을 맥락화하는 각이한 입장과 담론들 사이에서 최종적 판단을 보류한 채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본 전시가 종국에 전달하는 것은 인식론적 판단중지의 체험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는 ‘분열된 구멍의 철학’을 시연하는 전시라 해도 좋다. 그 체험은 구멍을 둘러싼 여러 인식에 접속하되, 결국 다시금 출발점으로 돌아와 접속 이전의 상태를 되찾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돌아오게 된 출발점은 경합하고 상충하는 논제들에 매개된 상태인바 최초의 출발점과 같지 않다. 다이어그램에 빗대자면 관객은 전시의 독해 과정에서 원환(torus)을 그리며 최초의 장소로 복귀하며, 실재 혹은 사태의 분열 앞에 다시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전시는 우리로 하여금 구멍에 관한 하나의 입장으로 튀어 나가길 닦달하는 것이다.
이는 본 전시가 취한 공동 기획의 형식 자체에서 연원하는 효과로 보인다. 요컨대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는 비엔날레나 중·대형 기획전에서 ‘공동 기획’의 형식으로 채택하곤 하는, 전체 전시의 큰 주제는 합의하나 각 큐레이터가 별도의 섹션·작가군·주제별 방을 맡아 개별적으로 기획하는 (역할 분담형 ‘모듈식 기획’이라 할 법한) 병렬 구조를 취하지 않는다. 외려 본 전시는 모든 기획자가 동등한 수준에서 전시 주제를 함께 만들고, 논의와 검수를 공동으로 수행하며, 작가 선정, 동선의 구성, 전시 서문과 작업 가이드 텍스트 일체를 공동으로 진행한바- 완전한 공동 저자형 기획을 시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같은 공동 기획의 형식이 조화로운 유기적 구성으로 나아가기보다, ‘구멍’에 관한 큐레이터 각자의 시좌로 표상되는바 분열을 전면에 내세워 이를 그대로 유지하며 하나의 결과물(단일한 전시동선, 단일한 작가군, 단일한 서문, 단일한 작업 가이드 텍스트) 내에 봉합함으로써 ‘분리 내 통일’의 구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로써 복수(plural)의 관점들은 서로를 상대화하여 우리가 하나의 관점 속에 침잠해 머무르지 못하게 하며, 우리는 다성적인 의미의 정박지들 사이를 오가다 결국 최초의 장소로 복귀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멍을 둘러싼 분열은 우리가 실재의 사태에 너무 빨리 가닿는 것을 유예 시키는데, 어쩌면 그와 같은 분열 자체가 실재의 사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요컨대 헤겔이 시사했듯, 하나의 사태 앞에서 이율배반적으로 분기하는 사유란 필연인바, 이는 인간 인식의 한계라기보다 우리가 역사를 운동시킬 수 있게 되는 실재(reality) 자체의 생산적이고도 긍정적인 속성이 아닌가? 김선영의 말대로 ‘구멍’은 자율적인가? 진세영의 생각처럼 ‘구멍’은 타율적인가? 강주영이 제기하듯 ‘구멍’은 내재적인가? 현실은 저들 사이 어딘가에, 혹은 저들 전부에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저들의 분열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열들 사이에 우리의 입장을 기입함으로써 어떤 방향으로든 역사를 조형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본 전시의 의미는 이렇게 읽혔다.
글의 서두에 제시한 것처럼 ‘구멍’을 일상적 계급투쟁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는다 해도 전시의 독해는 비슷한 경로를 따른다. 누군가 말했듯 계급투쟁이 계급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지한 유물론자의 태도라면, 조수민이 강박적으로 쫓는 시간, 파괴주의 인터내셔널이 주목하는 통제와 위반의 정동, 박금비가 살핀 공간적 폐색감과 이주 등 삶의 여러 층위에서 관철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실체적 계급에 앞선 채 사후적으로 계급을 구성해 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투쟁의 원형은 어쩌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자본의 운동 그 자체가 계급투쟁의 다른 표현이며, 안정적으로 완결될 수 없는 ‘구멍’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모순으로서의 구멍은 큐레이터들의 분기하는 입장들이 형성하는 판단의 교착 상태가 드러내듯, 상징화되지 않는 잔여로서의 실재(the Real)로 남을 것이다. 자신의 내부로 숱한 작은 구멍들을 예비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구멍은 자율적이고, 타율적이면서도, 내재적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상자에 구멍을 뚫는 일은 가능하며, 무용하면서도, 이미 주어져 있다. 본 전시에서 분열된 논제들은 동일한 것의 삼면이자 서로 다른 표현들이며, 하나가 둘로, 혹은 셋으로 나뉘는 실재의 양상 이상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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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Slavoj Žižek, Less Than Nothing: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New York: Verso, 2012), 807.
² 많은 경우 ‘물류(물적유통)’로 번역되는 ‘로지스틱스’는 상품, 자원, 정보 등이 생산지에서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흐름을 계획·조직·운영·관리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수송(운송)·보관·재고관리·포장·하역·배송·정보관리 등 공급망(supply chain) 전반의 운영 행위가 포함된다.
³ 공간 힘, “상자에 구멍을 뚫는 것은 가능한가?”, 전시 서문 핸드아웃, 2025.
⁴ 같은 글.
⁵ 같은 글.


* 정강산은 독립연구자로, 예술, 정치, 사회, 경제 등의 학제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관계 하에서 맥락화하는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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